적극적 평화로서의 ‘샬롬’(19. 12. 03)

전쟁을 막는 것만으로 평화에의 노력을 충분히 했다고 볼 수 없다. 전쟁을 막기 위한 평화에의 노력은 소극적이며 일부적인 것으로, 우리는 이러한 평화의 의미를 샬롬으로서의 적극적 평화의 개념으로 확장해야 한다. 히브리어에서 평화를 나타내는 단어 ‘샬롬’은 ‘제반 관계의 온전함’을 의미하는 것으로 전쟁의 부재 이상을 뜻한다.

전쟁을 막기 위해선 군사력의 균형도 중요하지만, 오늘과 같은 남북한 갈등의 원인을 규명하고 전쟁의 원인을 뿌리로부터 제거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작금의 북한 핵무장은 북한의 경제적 고립과 외교적 고립에서 일부 야기된 것으로, 북한을 국제 사회의 일원이 되게 하는 주변 국가들의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북한의 고립은 그들 스스로의 문제로부터도 야기된 것임을 인지해야 할 것이라 생각한다.

샬롬으로서의 평화는 전쟁의 종언을 고하는 정치적 선언만으로 마무리되지 않는다. 그 같은 적대적 관계의 청산은 보다 적극적인 평화의 관계를 요구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민간 사이의 교류를 확대해나가는 것이 필요하다. 금강산 관광의 재개, 개성공단의 정상화를 비롯한 남북한 철도의 연결, 적극적인 문화와 체육 방면의 교류 등을 진전시켜 나가야 한다.

이 같은 평화의 길은 외부적 행동과 정책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며, 정신적이고 영적인 문제와도 연결되어 있다. 평화에의 노력은 정치적이며 물리적인 노력으로 끝나서는 안 되는 것으로, 심리적이며 문화적인 노력도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음악과 미술과 영화와 문학을 통해 평화를 그려내려는 노력들을 경주하여야 하며, 더 나아가 그러한 노력들은 교육이란 차원에서 더 구체화되어야 할 것이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올바른 관계로서의 정의가 바로 서지 못하면 평화는 바르게 진작되지 않는다. 인간 사이의 본래적 정의로서의 절대적 평등과 그의 능력에 따라 몫을 취하는 비례적 정의 양자 사이의 균형적 관계가 이뤄지지 못하면, 평화의 노력은 물거품이 되고 만다. 인간의 자유를 강조하는 비례적 정의는 서로 나누어 먹는 것으로서의 양적인 평등과 균형을 이뤄야 하는 것으로, 자유의 시장경제를 강조하면서도 몫을 얻지 못한 사람들을 배려하는 사회가 될 때만이 성경적 샬롬은 성취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한반도 내에 절대적 빈곤에 사로잡힌 자들은 없는지, 그리고 그가 사회에 공헌한 바에 따라 부의 분배가 잘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항상 주의 깊게 살필 필요가 있다. 특히 국가간의 극단적 빈부차는 국제간의 갈등을 야기하는 주원인이 되는 것으로, 부유한 나라들이 빈곤한 나라들을 보살피는 구조를 만드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 된다.

인간과 자연의 관계가 바로 설 때 샬롬은 더욱 고취될 것이다. 경제적 논리만을 가지고 자연을 갈취하는 삶은 자연을 황폐화하여 결국 빈곤을 야기하고 인간 사이의 관계를 차등적으로 보게 하는 원인이 되는 바, 이러한 태도는 샬롬에 역행하는 것이다. 이에 우리는 보다 지속가능한 개발을 통해 자연을 보전해야 하며, 아울러 파괴된 조국의 산하를 회복하기 위한 노력을 경주해야 할 것이다.

더 나아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 회복 없이는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이 참다운 샬롬의 관계에 놓일 수 없게 될 것이다. 우리의 근본 존재를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구원 능력이 배제된 채 평화의 문제를 다루는 것은 근본의 병을 치료하지 않고 겉치장만을 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십자가의 사랑과 성령의 하나 됨을 통해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진정한 평화의 길로 인도함 받을 수 있다. 이런 주님의 능력을 온 세상에 퍼뜨리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반도의 진정한 평화는 복음 통일을 통해 성취될 수 있는 것이다.

평화는 하나의 정신적이며 영적인 문제로서 우리 사이에 평화에의 염원이 절실하지 않다면, 한반도의 평화는 진전이 어려울 것이다. 그러므로 한 민족의 평화의 정도는 그 나라에 사는 백성들의 삶의 패턴과 깊은 연관이 있다. 백성들의 삶이 이기적이고 폭력적이며 비정의에 노출될수록 우리 전체의 평화 진작은 점점 멀어지는 것이다. 한반도의 평화는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의 스타일을 평화의 선율로 조율할 때 가능해진다. 전투적이며 투쟁적인 삶의 양식에서 남을 배려하고 모두가 조화로운 삶을 추구하는 삶의 방식으로 전환할 때만이 샬롬의 평화는 진정 우리의 것이 될 것이다. 평화는 어느 누구의 손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각자가 평화에 대한 정신적 각성을 통해 성취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노영상/ 숭실사이버대학교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