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겔라 메르켈 총리의 퇴진 앞에서(21. 10. 05)

독일의 총선 결과가 절묘하다. 사민당이 제1당이 되었다고 하지만, 기민-기사당 연합과 근소한 차이인지라, 두 당 모두 연정을 구성하는 주체로 나서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두 당은 최소 두 개의 다른 정당과 뜻을 모아야 연정을 구성할 수 있기에 물밑 정치가 대단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제 지난 16년 동안 독일 시민의 절대적 지지를 받아온 앙겔라 메르켈 총리가 퇴진하는 시점이다. 그녀는 서독 함부르크에서 목사의 딸로 태어난 지 며칠 만에 동독으로 이주한 아버지로 인해서 동독에서 성장해야 했고, 동독 사회에서는 불리한 삶의 조건이었던 기독교인의 정체성을 지닌 과학자였다. 그녀는 독일 통일의 주역이었던 헬무트 콜 수상을 정치적인 후견인으로 삼아 30년 이상의 정치 여정을 성공적으로 걸어온 세계 최고의 정치인인데, 그녀가 퇴임 직전의 상황에서조차 독일 시민 80% 이상의 지지를 받고 있다는 사실은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앙겔라 메르켈 총리, 그녀의 멋드러진 정치 이면에는 목사 아버지의 신앙교육과 비판적 사회의식, 그리고 기독교의 숭고한 가치를 정치 현장에 구현하고자 한 기독교인으로서의 자기 정체성이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녀에게 기독교는 표를 모으기 위한 수단이나 기회가 아니라, 정치생명의 의미이자 방향이었고, 뿌리이자 에너지였다. 그녀는 한계 상황에 직면해서도 절망하지 않았고, 희망을 부여잡고 기어이 창조적인 정책과 현실을 만들어냈다. 헬무트 콜 수상의 정치비자금 스캔들이 터졌을 때, 그녀는 정치적 후견인이었던 콜 수상을 비판하고 정치적 독립을 선언했다. 이는 그녀의 기독교 정신, 정직과 겸손, 행동하는 양심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녀는 정치인으로 활동하는 동안 어떤 특권도 스스로 용납한 적이 없었고, 상대가 누구든 마음을 열어 소통했으며, 깊은 생각과 신중한 결정을 통해서 책임있는 정치를 수행해냈다. 그녀는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정치를 했던 것이 아니라 국가와 국민을 우선순위에 두고서 정치를 했으며, 그 결과 남녀노소를 막론한 대부분의 독일 시민들이 그녀를 사랑하고 신뢰하며 존경했던 것이다. 그녀가 100만 명이 넘는 시리아 난민들을 독일에 수용했던 것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인간에 대한 존엄성을 자신의 정치적 가치로 수용했기 때문이었다.

현재 독일 정치의 상황은 국가와 국민을 진심으로 걱정하고 사랑하고 번영과 행복을 위해서 전심전력했던 앙겔라 메르켈 총리의 시대가 지나가고, 오랜만에 제1당이 된 사민당으로 정권이 바뀔 수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메르켈 총리가 만들어낸 독일 정치의 고고한 물결은 결코 바뀌지 않을 것이며, 오히려 성숙한 정치를 향해 발전적으로 나아갈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국회의원이든 고위 공직자이든 개신교와 가톨릭을 합한 기독교인 정치인의 비율이 60%, 적어도 50%가 넘는 것으로 추정한다. 상당히 높은 비율이다. 이들 기독교인 정치인들로 인해서 우리의 정치가 존경과 신뢰, 정의와 평화, 적폐 청산과 검찰개혁, 사법개혁과 언론개혁에 이를 날이 올 것이라고 기대한다면 그것은 지나친 망상일까.

정종훈/ 연세대 교수, 평화통일연대 공동대표